책 리뷰: 구의 증명 (최진영 작가 소설, 줄거리/해석/명대사/독후감)

 

- 짧은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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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랗고 귀여울 줄 알았는데, 절절하고 애끓는 문장들이였다. 페이지 위에 떠 있는 동그라미가 때로는 비어있고 차있기도 해서 달처럼 보이기도 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은 담, ●은 구의 시점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담과 구'라는 인물의 존재감 자체를 상기시켜주고 소설을 시작하는 것 같기도 했다. 페이지를 넘겨 갈수록 검고 파랗게 질리는 구와 담의 얼굴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쓰디쓴 현실을 걷는 두 사람에게 우리집 찬장 안에 있을 흰 설탕을 나눠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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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가 구인 이유는 기구한 운명 탓일까, 담이 담인 이유는 온갖 기다림에 담담해져서일까, 아님 담담히 구를 삼켜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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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그리워할 때엔 상대방도 지금 나를 그리워하고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나와 같았던 상대의 마음을 알게 될 때의 벅참이란! 이 책은 친절하게도 구와 담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말해주어서, 이 참을성 없는 독자의 니즈를 충족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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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작가가 그리는 신선한 표현이 인상깊었다. 가령, 이모는 스피커를 만들면서 '소리를 만들어.' 라고 하고, 방향제를 만들면서 '향기를 만들어.', 손거울을 만들면서 '예쁨을 만들어', 전구를 만들며 '어둠을 만들어' 라고 말한다. 매일 밤 일기를 쓰듯 담의 집에 찾아가서, 골목에 발로 쓴 구의 일기는 담의 이름으로 채워졌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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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동력이자 서로의 존재의 증명이 되어준 그들을 멀찍이 바라보며, 왠지 모를 교묘한 질투심이 들기도 했다. 이미 서로 모든 걸 공유했기에 묻지 않아도 되는 과거와, 미친듯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현재와,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 할 거라는 확신을 가진 미래. 온통 너와 나인 세상을 사는 건 어떤 것일까. 남들 눈에는 요상하고 기괴해보이더라도 우리 둘만 좋으면 다 옳아지는 게 사랑이니까.

 

 

 

창세기

아티스트

9와 숫자들

앨범

보물섬

발매일

2014.11.24

 

작가의 말에서, 작가님께서 <구와 증명>을 쓰다가 지칠 때면 반복재생하여 들었다는 곡의 제목이 언급되어 있었다. 바로 9와 숫자들의 <창세기>. 너무- 좋으니 꼭 들으며 아래 문장들을 읽어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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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 컬렉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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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믿음은 아주 유용하다. 말도 안돼,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일에야 믿음이란 단어를 갖다붙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일단 믿으라. 그러면 말이 된다. 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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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대답이나 설명보다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더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지금 이해할 수 없다고 묻고 또 물어봤자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닌데 기다리지 못하는 건 죄가 되기도 한다고. 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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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다는 것은 몸이나 마음이 편하지 않고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괴로움 없는 사랑은 없다. 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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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향해 '너'라고 부른 그 순간만큼은 구도 나도 명징하게 기억했다. 27p

명징하다 : 깨끗하고 맑다. 군더더기가 없이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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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부리로 땅바닥을 툭툭 찼다. 땅에서 내 대답을 캐낼 것처럼. / 이모만을 사랑하던 나는 그날 이후 이모를 사랑하듯 구를 사랑했다. 내 사랑이 나뉘자 이모도 좋아하고 구도 좋아했다. 그때 이모는 여름을 만들고 있었다. 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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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은 나쁜 애가 아닌데. 담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담이와 보내는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 담이 하는 것은 나도 하고 싶었고, 담이 가는 곳에는 나도 가고 싶었다. 나쁘지도 올바르지도 않은 채로, 누가 누구보다 더 좋은 사람이다 그런 것 없이 같이 있고 싶었다. 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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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차가울 때면 구와 나는 그 대야에 따뜻한 물을 붓고 들어가 서로를 안았다. (...) 우리 머리와 어깨와 손가락 위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이러다 어떤 전설처럼 우리 몸도 증발되어 스르륵 사라질 것 같지 않아? 그런 전설이 있어? 없나? 없으면 우리가 하나 만들지 뭐. 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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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에 대한 생각이 서서히 옅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자,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 구는 엄청나구나. / 구 대신 들어온 다른 것들이 터무니없이 옅고 가벼워서 구의 밀도를 대신하지 못했다. 구에 비하자면 친구나 공부나 학교 따위 너무도 시시했던 것이다. 51p

이런 표현이 너무 좋다.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해서 그가 엄청나다고 생각한게 아니라, 그에 대한 생각이 떠난 자리에 다른 생각이 앉았을 때, 비로소 그 밀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는 말이... 그나저나 더지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구와 담이 본명이 아닐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애칭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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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일기를 쓰듯 담이 집으로 갔다. 대문 앞에 서서 마음으로 담아 담아 불렀다. 골목에 발로 쓰는 나의 일기는 온통 담으로 채워졌다. 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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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과 나에 대해 어머니가 심드렁하게 생각하든, 다시 잘 지내는구나 생각하든, 미심쩍은 눈으로 보든, 그 모든 생각과 시선이 다 싫었다. 잘 지내든, 못 지내든, 미심쩍든, 어떤 생각도 사실과 미세하게 어긋나는 것만 같았다. 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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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만은 그러지 않으면 좋겠는데. 위험한 세상 대하듯 나를 대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59p

 

몸은 저기 저렇게 남아 있고 마음은 여태 내게 달라붙어 있다. 저 무거운 몸을 내가 가져가고 이 마음을 담에게 남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마음도 네가 먹어주면 좋을 텐데. 나도 안다. 맑고도 우스웠던 우리의 첫키스와 그 겨울밤을 떠올리던 또 다른 밤도 나는 다 안다. 너와 다른 우주에서 온전히 기억하고 있어.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억뿐이니까. 기억이 나의 미래. 기억은 너. 너는 나의 미래. 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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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구와 함께 있을 때에도 구를 기다리는 기분이었고, 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도 내가 구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상대를 끝없이 기다린다는 뜻일까. 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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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일할 때 시간이 빨리 가면 좋잖아. 주저하다가 물었다. 그 속도로 내 삶이 지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좀・・・・・・ 무서워. 주저하며 구가 대답했다. 한참 후에 덧붙였다. 그렇게 늙어버리는 거 순간일 것 같아. 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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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싫은 건 아닌데 다 덮어놓고 일만 하는 건 싫어. 영영 그렇게 사는 건 싫어. 구 목소리에는 영 기운이 없었다. 그렇게 사는 게 싫다기보다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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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마음에는 제각각의 감정이 피어올랐겠지만, 기계 앞에 서면 그 감정을 잊어야 했다. 냉정하게 돌아가는 기계 앞에서는 어떤 감정을 품든 위험하니까.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나고 생계는 빠르게 망가지니까. 69p

이 문장을 읽으며 컴퓨터 앞에서 일을 하는 오늘 낮, 회사에서의 내 모습이 그려졌다. 사실 컴퓨터도 기계니까. 기계 앞에서는 아무 감정도 없다. 어떤 감정을 품고 기계 앞에 있는 사람들은 악플을 쓴다. 아, 기계에서 멀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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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과 별이 만나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되더니 그 시계가 촛농처럼 녹아 사라지는 그림. 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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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랑 누나는 사귀는 거 맞지? 노마가 물었다. 구와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우리는 사귄다는 단어를 채우고도 그 단어가 보이지 않을 만큼 넘쳐흐르는 관계였다. 7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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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와 나니까. 우린 헤어질 수 없는 사이니까. 내게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 그러는 동안 우리 마음에는 비슷한 공간이 만들어졌고, 떨어져 있을 때에도 그것은 같은 울림을 만들어냈다. 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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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을 때, 구와 나는 다른 조각으로 떨어져 있었다. 함께 하던 어느 날 구와 나 사이에 끈기있고 질펀한 감정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우리의 모난 부분을 메워주는 퍼즐처럼, 뼈와 뼈 사이의 연골처럼, 그것은 아주 서서히 자라며 구와 나의 모나고 모자란 부분에 제 몸을 맞춰가다 어느 날 딱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딱 맞아떨어지며 그런 소리를 낸 것이다. /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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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내가 참고 있는 것들을 물음표의 꼬챙이로 거듭 낚았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조차 참고 살았다. (...)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울 때에도 딱딱한 돈 무덤에 걸려 넘어졌다. 미래에 대한 내 근육은 한없이 느슨하고 무기력했다. 나의 미래는 오래전에 개봉한 맥주였다. 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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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로 시작한 이야기는 늘 취업으로 끝났다. 어떻게 하면, 어느 길로 가면 빨리 돈을 벌 수 있느냐의 문제. 빨리, 안정적으로 벌 수 있는가의 문제. 대부분 그 답을 찾고 있었다. 같은 나이의 친구에게, 네가 아직 세상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그건 아니고, 그건 힘들고, 그건 말이 안 되고,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고, 대부분의 문장이 그렇게 시작되거나 끝났다.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깊은 무력감에 빠졌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실패는 예정되어 있는 것 같고,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이미 진 것 같았다. (...) 이모는 언제까지 일을 하며 내게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가. 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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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되지? ・・・・・・ 그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야. 그 마음을 까먹으면 안 돼. / 걱정하는 마음? / 응. 그게 있어야 세상에 흉한 짓 안 하고 산다. 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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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내 마음은 담이 잘 알지. 잘 알고 짚어주지. 담을 생각하자 속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음을 간신히 붙잡고 있던 거중기가 고장 난 것 같았다. (...) 우리 사이에는 '왜'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누나와 함께 있을 때면 나는 가끔 허공에 대고 물었다. 왜, 대체 왜. 당신과 내가 어째서. 남녀가 만나는데 타이밍 말고 무슨 이유가 더 있느냐고 누나는 말했다. 그랬다. 우리는 남녀 사이였다. 담과 나보다 누나와 나 사이가 그런 정의에 훨씬 어울렸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이유가 필요했는데, 이유가 필요하다면, 그게 과연 사랑일까. 1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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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그러니 분명 아름다운 순간도 있었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함께일 때 가능했다. (...) 구의 기쁨과 환희, 우울과 절망에도 내가 있어야 했다. 그 욕심만은 오직 구만을 향했다. 1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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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아. 우리를 기억해줄 사람은 없어. 우리가 우리를 기억해야 해. 스물세 살 봄의 언저리였을 것이다. 구가 일회용 카메라를 손에 쥐고 말했다. (...)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 그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정말 좋았다. 소중했다. 함께이기에 마음의 그늘이 지금보다 연했던 그때, 비슷한 빛깔의 감정을 속삭이며 같은 곳을 바라보던 (...) 1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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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담에게 들을 과거가 없었다. 함께 겪었으니까. 겪을 때마다 감정을 공유했으니까. (...) 설명 없이도 대화는 성큼성큼 나아갔고 감정은 절로 드러나 꾸밀 필요 없었다. 침묵이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도 않았다. (...) 떠올릴 수 잆는 기억이 있어 좋았고, 그게 참 소중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눈앞의 누나를 보면, 그 사이 세월이 삼십 년쯤 흘러버린 것 같았다. 산을 수십 개 넘고 강을 수백 개 건너도 도무지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담을 두고 온 것 같았다. 108p

구와 담이 서로에게 너무나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난 페이지가 아닐까... 나는 왜 이런 존재가 여직 없었지. 왜 난 이런 존재가 되지 못했지. 읽으면서 그들이 오히려 부러울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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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밖은 파랗고 할아버지의 몸은 검었다. 파랗고 검은 것은 외롭다. 외로운 색이다. 1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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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영하 270도. 아주 춥겠지. 당장 얼어붙겠지. 썩지도 않겠지. 그럼 예쁠 것이다. 우주를 동동 여행하는 유리 돛단배 같을 것이다. (...) 지금이 천만년 만만년 뒤라면, 그럼 나는 구의 몸을 업고 지구를 떠날 수 있을 텐데. 사이좋은 동동 유리 돛단배가 될 수 있을 텐데. 먹는 것보다는 그게 좋지 않을까. 문을 열고 밤하늘을 본다. 수많은 별이 빛을 품고 창백하게 얼어버린 주검 같다. 만만년 뒤 구와 나는 저기 있을까. 공기도 빛도 소리도 없는 저 머나먼 곳에. / 거긴 많이 추워? 가만히 멈춰 구의 대답을 기다린다. 129p

얼어붙은 우주를 떠다니는 동동 유리 돛단배... 너무 마음에 들어. 구와 담의 이야기가 쓰여진 8년 후에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천만년 만만년 뒤에도 내가 살아남아 이 소설을 다시 읽을 수 있다면, 나는 그때 유리 동동 돛단배에서 죽겠다고 유언을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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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든 쌍이 있지 않은가. 쌍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들었다. 우주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했다. 아주 거대한 별도 그렇고, 가장 작은 원자도 그렇다고. 그렇다면, 내 인생의 행운에 이모만 있을 수는 없다. 이모를 끌어당기면서도 밀어내는 또다른 행운이 있어야 했다. 그건 바로 구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구는 돌아온다. 돌아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바로 내가 여기 있으니까. 1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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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에 돋아난 벚나무의 흰 꽃이 피고 지는 걸 두 번이나 봤다. 고요하고 아담한 날들이었다. 1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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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소니 빈 얘기가 지어낸 거라고 해도, 아무 죄의식 없이 사람을 잡아먹는 경우는 분명 있지 않았을까. ・・・・・・지금도 있지 않을까. 죄책감 없이. 당연하게. 쭉 그래왔으니까. 약한 놈만 골라잡으면서. 잡힌 놈이 등신이지, 생각하면서. 애들도 그렇게 키우고. 잘 잡아먹는 게 능력이라고 가르치고. 후회한다면, 힘이 세지 않은 걸 후회하고. 죄책감을 갖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고. (...) 담아. 우린 그렇게 키우지 말자. 우리 애. 161p

소니 빈 : 15-16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처형당했다는 전설적 식인가족의 가장. 그의 이야기는 구전되어 현재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관광상품의 일부로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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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 사람은 신을 믿는다. 그리고 신을 이용한다. 사람은 수술을 하고 약을 먹어서 죽음을 미룰 수 있다. 163p

난 아직도 가끔씩 물건에 인격을 부여하고는 하는데, 이게 아이의 특성인지는 몰랐다. 난 아직 철이 덜 든 건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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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온갖 나쁜 것들이 빠져나왔대. 근데 거기 희망은 왜 있었을까. 희망은 왜 나쁜 것을 모아두는 그 항아리 안에 있었을까. (...) 희망은 해롭다. 그것은 미래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끌어들이니까. 욕심을 만드니까. 신기루 같은 거니까. 이 말을 왜 해주고 싶었냐면, 나는 아무 희망 없이 살면서도 끝까지, 죽는 순간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그건 바로 담이 너 때문에. 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167p

 

 

 

 

그때는 네 옆에 잠시라도 있으려면 널 괴롭혀야 했다. 너와 눈을 맞추려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네게 알리려면, 너에게 나란 존재를 새겨 넣으려면. 혹시라도 너의 무표정을 보게 될까봐 겁이 났다. '안녕'하고 말했는데 '안녕'으로만 끝날까봐. 아니, 그 인사조차 돌려받지 못할까봐.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겉치레 인사 말고, 너의 고유한 표정과 감정을 갖고 싶었다. (...) 왜 하면 안 되는데? 시비 걸 듯 놀리면서 우리만의 특별한 시간을 고무줄처럼 쭉쭉 늘리고 싶었다. 1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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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화가 났어. 내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이 널 괴롭게 하는 것 같아서. (...) 밖을 봐. 네가 밖을 봐야 나도 밖을 본다. / 네가 살아야 나도 살아. / 담아. / 이 바보야. 1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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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는, 죽으면 죽은 사람들끼리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천국이나 극락 같은 곳이 아니더라도, 곡물을 체에 거르면 크고 무거운 것은 남고 작고 가벼운 것은 걸러지듯, 몸을 버리고 가벼워진 혼끼리 따로 모이는 우주가 있을 거라고. 1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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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 다른 존재로 만난 너를 내가 사랑하게 될까. 다른 존재인 나를 네가 사랑해줄까. (...) 나는 내가 사랑하는 너 아닌 그 어떤 너도 상상할 수 없고, 사랑할 자신도 없다. 이승에서 너를 사랑했던 기억, 그 기억을 잃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나를 기억하며 오래도록 살아주기를. (...) 결국 너마저 죽는 날, 그렇게 되는 날, 그제야 우리 같이 기대해보자. 너와 내가 혼으로든 다른 몸으로든 다시 만나길. 네가 바라고 내가 바라듯, 네가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은 후에, 그때에야 우리 같이. 1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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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네가 죽는다면, 그때가 천 년 후라면 좋겠다. 천 년토록 살아남아 그 시간만큼 너를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천만년 만만년도 죽지 않고 기다릴 수 있으니까. 174p

이렇게 애끓고 절절한 사랑일 줄은. 후반부로 갈수록 심장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담을 향한 구의 사랑은 너무너무 활활 타버려서, 새까맣게 재가 되었는데도 아직 그 열기를 품고 있는 그런 사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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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내가 쓴 글인데도 내가 쓴 글 같지 않다. 그런 묘한 기분에 휩싸여 재교를 봤다. 175p

재교 : 초교 후에 다시 교정함. 또는 그런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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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 애인의 살은 찹쌀떡처럼 쫄깃하고 달았다. 그런 상상을 가능케 하는 사랑. 그런 상상을 가능케 하는 상상. 17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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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많은 날 나는 사랑하면서도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쓰는 순간에도 '글을 쓰고 싶다' 생각하고, 분명 살아 있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버린다. 그러니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지만, 사랑하고 쓴다는 것은 지금 내게 '가장 좋은 것'이다. 살다보면 그보다 좋은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더 좋은 것 따위, 되도록 오랫동안 모른 채 살고 싶다. 177p